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시인 바이런
淸潭
2025. 5. 25. 09:28
유부녀로 빼곡한 잠자리 리스트…결혼한 여동생까지 습격한 난봉꾼에 돈이 몰렸다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2025. 5. 24. 13:06
[히코노미-22] 천재적이면서 동시에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타고난 문재(文才)로써, 유려한 글로써 많은 여성의 몸과 마음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잠자리 리스트에는 숱한 유부녀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서 침실로 자연스레 들어갑니다. 어찌나 폭식가인지. 잠자리 대상에는 결혼한 이복 여동생도 포함됩니다.

바이런을 묘사한 1848년 삽화.
셀 수 없는 섹스스캔들로 그는 조국에서 사실상 추방당합니다. 찬사의 손짓은 경멸의 손가락질로 변해 있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될 법한데, 그가 서 있던 곳은 의외로 전쟁터. 타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 전쟁에 나서자 기어이 자신의 몸을 던진 사나이.
며칠 후 그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을 대표하는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의 이야기입니다.
바이런의 죽음은 쉽게 휘발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투자열기’를 불렀습니다. 난봉꾼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런던 시민들이 ‘그리스 독립 채권’을 잇달아 사들입니다. 진한 감정선은 언제나 돈줄기와 연결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에 빠진 영국의 바이런
조지 고든 바이런은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4살 때 매춘을 일삼다가 외국에서 객사합니다. 어머니는 걸걸한 입으로 다리에 장애가 있는 바이런에게 욕을 내뱉었지요. 고향 땅은 그에게 꽃이 피지 않는 불모의 땅.바이런이 언제나 다른 곳에서 이상향을 찾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였습니다. 고대 신들이 고대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곳. 태초의 미가 숨결을 뿜어내는 곳. 그가 21살이 됐을 무렵 그리스로 여행 ‘그랜드 투어’를 떠난 배경이었습니다. 이미 폐허가 된 고대 그리스 신전 앞에서 그가 느낀 전율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아름다운 그리스여, 사라진 유적의 슬픈 가치여.”

그리스 여행의 기억을 책으로 써냈습니다.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가 그 작품이었습니다. 세상을 유랑하면서 몽상에 젖어 들고 쾌락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내의 여정이었습니다. 선의 결정체 같은 기존 영웅들과는 궤를 달리한 덕분인지, 책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바이런이 런던 사교계의 스타가 됐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여성에게 바이런은 언제나 몸과 마음을 열었습니다. 바이런을 안 거친 귀부인을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캐롤라인 램이라는 여성은 바이런이 안 만나준다는 이유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배다른 여동생 오거스타 리(유부녀)와도 성 추문을 일으키면서 결국 그는 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방당한 바이런, 그리스로 향하다
조국을 떠난 그가 찾은 곳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그리스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이슬람 맹주 오스만제국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지요. 고대 그리스가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 온전히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이런의 가슴은 벅차올랐습니다. 유럽의 슈퍼스타인 그가 그리스독립전쟁에 참전한 배경이었습니다.잉글랜드에 있는 재산 2만 파운드를 팔아서 군대를 직접 소집하기도 했었지요. 정작 그는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열병에 걸려 타국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별은 거대할수록, 더 강력한 블랙홀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바이런이라는 별의 죽음은 유럽의 모든 관심을 그리스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타국에서 산화한 서사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Immortal, though no more!’(더는 존재하지 않으나, 불멸하는 그리스여) 바이런의 글귀를 되새깁니다. 서구 문명의 요람이었던 그리스, 고대의 지혜를 간직한 그리스, 이슬람에 억압받는 그리스. 문명의 요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이 폭발합니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찬미를 의미하는 ‘필헬레니즘’은 바이런을 기점으로 더욱 크게 성장합니다.

바이런의 죽음, 투자의 불쏘시개로
바이런에 대한 추모는 단지 광장에서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런던의 시민들이 몰려간 곳은 런던증권거래소. ‘그리스 독립 채권’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이런을 애도하는 런던 시민들의 추모 방식이었습니다. 1824년 80만 파운드 채권이 흥행에 성공하자 이듬해에는 200만 파운드 규모가 추가 발행됩니다. 그야말로 흥행대박이었습니다.그리스 독립을 위해 돈이 쓰인다는 낭만적 이유와 수익률이 10%에 육박한다는 투자 욕망이 결합된 덕분이었습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그리스가 유력 투자처로 떠오른 데에는 시대적 배경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때 큰돈을 번 투자자들이 새로운 고수익을 찾아 나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당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1803년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영국 정부는 엄청나게 큰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했지요. ‘콘솔’이라고 불리는 영국 국채의 등장이었습니다. 1년에 3%의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 채권 수익률은 전쟁 상황에 요동쳤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채권 가격이 액면가의 30%로 폭락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에 무릎을 꿇으면 국채 이자를 지급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국채는 언제나 나라의 운명과 명운을 함께 합니다. 결국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투자자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모인 투자자들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허기입니다. 돈의 맛을 본 투자자들은 더 큰 수익을 찾아 나섰습니다. 영국 국채의 낮은 이자를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그때 등장했던 것이 바로 ‘그리스 독립 채권’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자유주의자들과 정치인들이 만든 ‘런던 필헬레닉 위원회’(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이 앞장서 채권 투자를 독려합니다.
그리스 독립군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당대 최고 자본주의 국가 영국의 대규모 민간 자본이 신생 독립 국가로 흐르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국제적 공공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필헬레니즘 물결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 방식은 비자본주의적이었습니다. 직접 군사를 지원하거나, 기부금을 전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런던에서만이 숭고한 이상과 세속적 욕망이 결합된 채권이 발행됩니다. 외국인들도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그리스 독립 채권을 샀습니다.
조악한 그리스 군대
숭고한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때로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애써 조달한 금액이 높은 브로커 수수료 때문에 절반 밖에 그리스로 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채로 조달한 금액이 영국 내에서 바로 무기 구입으로 사용되곤 했는데, 선박이 침몰해 도착하지 않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리스 독립군은 그 돈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당나라 군대 수준이었습니다. 이권 다툼으로 분열하기 수 차례.
채권으로 조달한 금액은 오늘날 기준으로 수천억 원에 달했지만, 그들의 군복은 여전히 낡았고 무기는 조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스 독립군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상 유지 뿐. 오스만 제국군이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다시 승기를 잡습니다. ‘그리스 독립 채권’도 부도 위기를 맞았다는 의미였습니다.
유럽의 필헬레니즘 열기는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유럽의 모태인 도시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채권값 폭락에 대한 분노도 열정의 땔감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는 언제나 대중의 열망을 쫓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그리스 독립전쟁 개입을 선언합니다. 유럽의 모태를 다시 찾겠다는 선언입니다. 오스만 제국이 결국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1832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런던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 채권 열풍 라틴아메리카로 옮겨붙다
혁명에 투자한다는 그리스 독립 채권의 등장에 미소짓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이끄는 사내, 시몬 볼리바르였습니다.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던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대서양 건너인 라틴 아메리카에도 펼치겠다는 포부를 가진 인물이었지요.그는 이미 10년 전 1810년에 영국 런던을 찾았습니다. 독립 자금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거절. 당시 프랑스와 전쟁이 급선무였던 영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몬 볼리바르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그리스 독립 채권’이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것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혁명 채권’ 열기에 올라타고자 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런던의 자본주의는 독립국의 꿈을 자본으로 다시 빚어낼 충분한 의지와 욕망으로 충만했습니다. 금리 역시 영국 국채의 두배에 달했습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1820년대 발행된 4010만 파운드 14개국 국채 중 7개국이 라틴 아메리카 신생 국가였을 정도였습니다. 스페인 제국과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였던 영국인들의 민족정신도 이같은 투자 열기에 불을 지폈습니다.
붐에는 언제나 거품이 낀다
다양한 국채 투자를 위한 홍보자료가 런던 길거리에 뿌려집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얼마나 많은 금광이 매장돼 있는지, 이곳에 얼마나 많은 세계 상선이 왔다 갔다 하는지. 유려한 글솜씨와 화려한 그림체로 설명이 돼 있었지요.시몬 볼리바르와 같은 독립 영웅들의 영웅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독립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부가 뒤따른다는 장밋빛 전망. 더 많은 홍보성 자료가 퍼질수록, 더 많은 투자자들이 혁명채권을 사들였습니다. ‘남미투자’ 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신흥시장(emerging market) 투자 붐과 같았습니다.

욕망이라는 거품에 부패는 가려지기 마련입니다. 런던 투자자들의 ‘묻지마 투자’ 분위기를 틈타 한탕 당기려는 사기꾼도 등장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그레고르 맥그리거는 자신이 라틴 아메리카에 ‘포야이스’라는 신생 국가를 세웠다면서 채권 투자를 독려하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그가 조달한 금액은 6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물론 포야이스라는 나라는 실존하지 않았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라는 이름만 붙으면 돌이라도 살 기세였습니다.

욕망이 오염시킨 독립의 이상
투자 금액은 거대했으나, 라틴 아메리카에 실제 도착한 금액은 미미했습니다. 그리스 채권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중개 수수료, 부패로 인한 재정 누수 등. 미미한 금액이었지만 독립군들은 이 돈을 무기삼아 스페인 제국에 맞섰습니다. 스페인의 국력이 예전같지 않았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질 수 있었습니다.그리스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마침내 독립을 찾았습니다. 더 이상 제국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이 땅은 온전히 우리들의 것이라는 외침이 그리스와 라틴 아메리카에 울려 퍼집니다.
독립의 단꿈은 그러나 현실의 씁쓸함에 희석되고 있었습니다. 쓸 돈은 많고, 들어오는 돈은 적었기 때문입니다. 재정 건전성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채권 홍보에 쓰여 있던 ‘감언이설’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는 채권 이자를 지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잇달아 채무불이행을 선언합니다. 투자금액 2000만 파운드가 그대로 날아갑니다. 런던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봅니다. 은행 12개가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1825년의 패닉이라고 부른 사건이었습니다.
채권 추심이 잔혹한 건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스는 1830년대 후반 다시 돈을 지원받는 대가로 외국인 감시단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재정 정책에 손 발이 묶이게 된 것입니다.
1860년대 멕시코가 프랑스로부터 침공 당한 이유도, 베네수엘라가 1902년 유럽 열강으로부터 군함 봉쇄를 당한 이유로 ‘남미 채권’붐이 지목됩니다. 국채라는 달콤한 금융지원이 정치적 자유를 억압한 수단이 된 역설이었습니다. 호색한 바이런의 죽음이 그려낸 경제사의 씁슬한 풍경이었습니다.


<네줄요약>
ㅇ영국 유명 시인 바이런은 숱한 성 추문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ㅇ조국을 떠난 그는 고대 그리스에 심취해 그리스 독립운동 뛰어들었다 죽음을 맞았다.
ㅇ바이런을 향한 추모 열기로 런던 수 많은 투자자들이 그리스독립채권을 사들였는데, 높은 이자수익과 독립을 지지한다는 이유가 결합된 덕분이다.
ㅇ라틴아메리카 독립 채권까지 등장하면서 독립채권 붐이 일었지만, 거품이 꺼지면서 결국 큰 투자 손실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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