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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후집 제2권 / 고율시(古律詩) / 이규보(李奎報)
淸潭
2025. 5. 13. 16:41
동국이상국후집 제2권 / 고율시(古律詩) / 이규보(李奎報)
백낙천의 병중십오수(病中十五首)에 화답하여 차운하다 병서(幷序)
내가 본시 시를 좋아함은 비록 오래 지녀온 버릇이기는 하지만, 병이 들자 평소(平素)의 두 배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까닭은 알지 못한다. 사물을 접하여 흥이 깃들 때마다 읊지 않는 날이 없어서 그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도 역시 병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일찍이 시벽편(詩癖篇)이란 글을 지어 뜻을 밝힌 일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슬퍼해서였다. 또 식사할 때마다 겨우 몇 숟갈을 떠 먹고는 오직 술만 마셨기 때문에 늘 이것을 걱정했다. 그런데 백낙천의 《백향산집(白香山集)》후집(後集)에 실린 노경에 지은 시들을 보니 대부분이 병중에 지은 것이었고 술을 마시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중의 한 시[자해(自解)]에서는 대략 읊기를,
내 또한 마음잡고 내 숙명 살펴보니 / 我亦定中觀宿命
빚 많이 진 것은 시가였던 모양일세 / 多生債負是歌詩
아니라면 어이하여 미친 듯이 읊조리고 / 不然何故狂吟詠
병든 뒤엔 그 전보다 더 많이 짓는가 / 病後多於未病時
하였고, 수몽득견희질추(酬夢得見喜疾瘳)라는 시에서는,
가물가물 면이불 밑에서 / 昏昏布衾底
병과 취기와 잠이 어우러지네 / 病醉睡相和
하였고, 복운모산(服雲母散)이란 시에서는,
약기운 가시고 날 저물자 밥 세 숟갈 먹는다 / 藥消日晏三匙食
라고 읊었는데, 나머지 다른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이 뒤로는 대단히 여유가 생겨서 ‘나뿐만이 아니라 옛 분들도 역시 그러했다. 이건 모두가 오랜 버릇 때문이니 어찌 하는 수 없는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백낙천은 병가(病暇)를 얻은 지 1백 일 만에 퇴임을 했는데, 나도 근일(近日) 퇴임을 요청하려 하고 있는 중이어서 병가를 얻은 날까지 계산해 보니 1백 10일이 된다. 뜻밖에도 이처럼 두 사람은 비슷하다. 다만 내게 없는 것은 번소(樊素)와 소만(少蠻)인데, 이들 두 첩 역시 백낙천이 68세 되던 해에는 놓아 보내 주었으니, 이때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아아, 재명(才名)이나 덕망은 비록 백낙천을 못 따르겠지만 늙어서 병이 난 다음의 일들은 나와 비슷한 점이 대단히 많다. 그래서 그의 병중십오수에 화답함으로써 그러한 정을 펴보려는 바이다.
초병풍(初病風) 순화(順和)
하늘이 지금 이 늙은이 싫어하여 / 天方厭此翁
헛열을 내려 괴롭힌다 / 虛熱幸而攻
온몸이 아프고 가려운 것은 헛열 때문이다.
온몸이 옴 오른 듯 가렵고 / 癢似通身疥
손 떨리니 수전풍(手顫風) 아닌가 한다 / 搖嫌顫手風
가끔 손이 떨린다.
책상에는 오직 약이 쌓여 있고 / 案唯堆藥餌
마당에는 쑥대도 깎지 않았다 / 庭不剗蒿蓬
겨울 따스하니 파리가 그대로 있어 / 冬暖蠅猶在
서로 약속한 듯이 베개로 몰려든다 / 相謀到枕中
침상(枕上)에서 짓다순화
새벽 추위 이불 속에서 머리 들기도 겁나더니 / 曉寒衾底怯擡頭
화롯가로 다가가니 손발이 녹네 / 漸近烘爐手足柔
그윽한 방 닫아놓고 나가지도 못하니 / 閉却幽房猶未出
옛날 실컷 놀아볼 걸 후회가 된다 / 悔他當日不窮遊
벼슬이란 해진 신 같아 벗어도 그만이고 / 官如弊屣何妨脫
몸은 외로운 구름 같아 절로 떠다니는 것을 / 身似孤雲本自浮
인생사 꿈속이라 파초잎으로 덮은 사슴 믿지 말고 / 莫信夢中蕉覆鹿
골짜기에 숨긴 배도 밤중에 옮기면 뉘라서 알리요 / 那知夜半壑移舟
한가히 말 타고 꽃 찾던 일이며 / 憶曾閑跨尋花騎
갖옷 훌훌 벗어주고 술 마신 일 생각난다 / 不惜輕抛換酒裘
젊었을 때 멋대로 득의(得意)했으니 / 年少狂顚眞可詑
병중에 회상하면 시름 매양 지워준다 / 病中追記頗寬憂
‘한 상인의 문병에 답하다[答閑上人問病]’라는 시는 ‘문병해 준 손님들에 답하다’라는 시로 대신한다
시름이 미간(眉間)에 껴 풀리지 않는 것은 / 愁入眉頭鎖不開
술병 들고 오는 손님 없기 때문일세 / 只緣無客摯壺來
이 몸의 작은 병 위문할 것 있는가 / 此身微恙何須問
칠십 세에 쇠약해짐은 재앙이 아니네 / 七十衰羸未是災
병중에 다섯 절구(絶句)를 짓다순화
옛날엔 걸음 빨라 날 따르는 이 적었고 / 當年步捷鮮人隨
말솜씨와 시 짓는 것도 모두가 빠르다 하였네 / 語與詩然世共知
옛날에는 친구들 사이에 나는 삼첩(三捷)으로 알려졌다. 걸음이 잰 것이 1첩, 말 빠른 것이 2첩, 시가 빠른 것이 3첩이었다.
평소에는 함부로 삼첩이라 뽐냈는데 / 平日謾誇三捷在
오직 병만은 낫기가 더디구나 / 獨於沉瘵得痊遲
가쁜 숨은 끊어지려는 실 같지만 / 餘喘雖微欲絶絲
명이 길고 짧은 것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 / 壽殤脩短在天爲
세인들은 살기만을 탐하는 뜻을 지녔지만 / 世人只抱貪生志
늙어서 죽는 것도 어려서 죽는 거와 다를 바 없는 것을 / 老死猶同夭死時
목이 타면 술을 부어 입술은 늘 젖어 있고 / 酒澆焦涸吻長濡
시가 풍류 끌어들여 생각은 마르지 않는다 / 詩引風流思不枯
오직 파리한 몸 살 오르지 않는데 / 唯是癯身肥不得
몸이 있어 걱정이라면 없는 것만 못한 거지 / 患緣身有不如無
천만 가지 일 생각에 잠시 잠 못 이루었지 / 算量千事暫妨眠
진리를 찾으려고 좌선(坐禪)함은 아니다 / 不是觀空衲子禪
한가한 취미 더해진 게 기쁘기만 하노니 / 唯喜得添閑氣味
퇴임한 늙은이에게 공문서가 다시 오랴 / 簿書那到退翁前
가벼운 병 가지고 어찌 크게 근심하랴 / 豈爲微疴特地憂
절름거리는 걸음이 나가 노는 것만 방해한다 / 步欹唯礙出門遊
문 나선다고 마음이 트일 것도 아니지만 / 出門未必心開豁
그래도 푸른 바다에 떠나는 배 보고 싶다 / 猶望滄溟去去舟
‘숭산손님을 전송하다.[送嵩客]’라는 시는 집안 스님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는 것으로 대신하다
마침 서울에 오신 것이 전부터 기약한 것 같으나 / 適來京輦似前期
갑오년에 남쪽으로부터 와서 아들 집에 머물다가 지금 막 돌아간다.
천리 남쪽으로 가면 또 누구를 찾을 건가 / 千里之南又訪誰
이제 가시면 소식인들 들을 수 있으리까 / 此去能傳消息否
하늘 저쪽 가시면 생사조차 아득하리 / 天涯生死杳難知
‘뜸질을 그만두다.[罷灸]’라는 시는 약과 음식을 물리치는 것으로 대신하다
자식은 약 들라고 권하나 응하기 싫고 / 兒勤進藥猶慵應
처는 식사 더 권하나 또한 듣지 않는다 / 妻勸加飧亦莫聞
이 몸 봉양하여 어디에다 쓸 것인가 / 養得此身何處用
물거품처럼 모였다가 구름처럼 흩어질 것을 / 聚如漚點散如雲
‘검은 갈기의 흰 말을 팔다.[賣駱]’란 시는 여윈 말을 가슴 아파함으로써 대신하다
백사제 그 길을 몇 년이나 달렸던가 / 白沙堤上幾年行
마구간 낡고 날씨 추우니 몇 마디의 우는 소리 / 破廏天寒叫數聲
너와 주인이 다 함께 늙었구나 / 汝與主人俱老矣
앙상한 뼈 바라보니 문득 가슴 아파진다 / 相看瘦骨忽傷情
‘유지를 놓아 보내며[放柳枝]’라는 시는 옛날 기생을 추억하는 것으로써 대신하다
젊었을 적 기생과 놀던 일 꿈속 같은데 / 少年携妓夢魂中
어느덧 쓸쓸한 백발노인이 되었도다 / 已是蕭然白首翁
붉은 볼 푸른 눈썹은 어디로 사라졌나 / 紅頰翠娥何處散
낙화가 펄렁펄렁 바람에 흩날린다 / 落花飄蕩摠隨風
‘햇볕 쪼이다 우연히 술잔을 들다.[就暖偶酌]’란 시는 자다 일어나 술잔을 드는 것으로써 대신하다
남헌의 육척 침상에서 잠 깨어 / 睡罷南軒六尺床
기지개 펴며 일어나니 벌써 해 저물었다 / 欠伸方起已殘陽
한가히 술잔 기울이니 놀이 얼굴에 펴오르고 / 閑傾綠醑霞昇臉
누런 감귤 잘근 씹으니 눈이 창자로 드는 듯하다 / 細嚼黃柑雪入膓
잠시 취흥에 겨우면 노래해도 좋고 / 醉興暫來歌亦可
여전히 병객이니 누운들 어떠하랴 / 病客猶在臥何妨
내 정신을 혼미하다 말하지 마라 / 莫言神思都昏喪
이십 년 전 일들도 잊지 않고 있단다 / 二十年前事不忘
‘세모에 사암에게 보내드리다.[歲暮呈思黯]’라는 시는 새벽에 온 손님에게 주는 것으로 대신하다
다행히도 은퇴한 늙은 대부(大夫) 찾아 주셨으니 / 幸訪懸車老大夫
허락은 아직 안 내렸지만 이미 퇴임을 요청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새벽 날씨 추운데 한 잔 안 할 수 있겠소 / 曉寒能飮一盃無
몸 기우뚱 걸음 절름 그대 비웃지 마시오 / 身欹步仄君休笑
궁전 문 앞 관리들의 부축해 줌 면했다오 / 已免君門吏挾扶
한대(漢代)의 재상 채의(蔡義)의 고사.
자해(自解) 순화
늘그막에 생각 버려 행동이 평안하니 / 老境忘懷履坦夷
백낙천의 일을 내 스승삼으리 / 樂天可作我爲師
세상에 빼어난 재주는 미치지 못하지만 / 雖然未及才超世
병들어서 시 좋아함 우연히도 비슷하고 / 偶爾相侔病嗜詩
그 당시 은퇴할 때 비교해 보면 / 較得當年身退日
이제 내가 물러나려는 때와 비슷하도다 / 類予今歲乞骸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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