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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고택(故宅)

淸潭 2016. 7. 14. 11:14

충남 예산(忠南 禮山)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故宅)

 

 

~<정 의>~

 

김정희는 조선 후기 교목세가의 하나인

 경주 김씨 출신으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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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묘는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찍이 북학파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왔다.

 

그 뒤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生)을 마쳤다.

 

 

 

 

 

 

 

 

 

고택(故宅)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추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영실()로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고택 풍광에 눈이 환하다.

 야트막한 뒷산과 담장 안 봄꽃의

 어울림이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에 의해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대청 앞

모란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5월,

 추사가 직접 쓴 글씨로 각자한

시계 ‘석년()’ 위로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뒷동산 꾀꼬리 맑게 우는 소리에

 한나절이 간다 생각하니

 고택(故宅)의 느낌이 더없이 적막하다.

 

 

 

 

추사는 문인이요, 예술가이다.

 추사는 역대 법첩()과

 비석 금석문을 두루 섭렵하여

 추사체()라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했다.

 

추사체는 당시 조선이나

 에서도 일찍이 보지 못한 서법이다.

 그는 또한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시문에 정통한 시인이자 문장가이기도 하고,

 불교에 심취해 선교종지()를

 깨달은 선지식이기도 하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ㅁ자형 사대부 종가로

 육간대청의 너른 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문간방을 두었다.

 내당 마당에 내리는 햇살이 정갈하다.

 

 

 

 

 

 

 

 

안채 뒤 후원으로 이어지는

 추사영실()은 추사고택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추사영실’이라 쓴 현판 글씨는

 추사의 지기()인

 이재() 권돈인(, 1783~1859년)이쓴 것으로

 추사의 인품을 보듯 붓끝이 굳세고 힘차다.

 조선 양반가의 한 전형이다.

 

 

 

 

추사 김정희( ,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順翁)와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왕실의 내척()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說話)도 갖고 있다.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그가 태어난 향저(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서울 집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의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재상 채제공()이
 그의 아버지에게 충고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 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
 
천재성이 그의 인생에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드리우고 있음을
 노재상이 알아본 것 이다.
 
그가 살다간 19세기 조선 사회는
 18세기의 진경문화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조선 문화의 보편성으로
 흡수해야 하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2 0 1 6. 7. 1 3. 시 곡(枾 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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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시 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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