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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談] 우리는 조선서 왔소

淸潭 2015. 11. 25. 11:06

네 이놈들! 밥을 왜 철철 흘리노?

 

옛날에 동래 정씨 한 분이 유명한 대감으로서 이름을 날리며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동래 정씨 노인들이 서울 사는 일가 대감을 한번 찾아가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대감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였던 까닭입니다.

 

"우리 동래 정씨 가문에 아무개 정승이 참 대단하다는데 우리 한번 놀러가 봅시다."

하고 의논을 모아서, 서울의 정대감 댁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기차도 버스도 없었지요. 모두들 걸어 다닐 땝니다. 대나무 지팡이에다가 짚신을 신고 개나리봇짐을 짊어진 채 나그네 노릇을 하였습니다. 여러 날 동안 주막집에서 자고 밥을 사먹어 가며 먼 길을 걸어온 터라 노인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허기도 지고 발걸음도 지쳤습니다. 해가 시르르 빠져서 해그름이 질 무렵에 드디어 정대감댁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대문을 열고 썩 들어서니 마침 정대감의 아들이 나왔습니다.

"어디서 온 영감들이요?"

할아버지들은 기분이 썪 나빴습니다. 젊은이가 노인들께 하는 말버릇이 돼먹지 않았습니다. 정대감만 만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우리라 믿고서,

"우리는 동래서 온 사람들인데, 정대감을 만나러 왔네."

하고 정대감을 찾으니, 아들은 초라한 행색의 시골 노인네들이 반갑지 않은 터라, 제 고향마을인 동래라는 말을 듣고서도 잘 모르겠다는 투로,

"도대체 어디서 왔다구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시골 노인들도 화가 버럭 났습니다. '고향에서 일가 어른들이 찾아왔는데, 이렇게 모른 척하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우리는 조선서 왔소!"

하고는 소리를 냅다 질러버리고 곧장 돌아서서 정대감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서야 정대감이 쫓아나와서 아들에게 다구쳐 물었습니다.

"웬 손님들이 찾아와서 무슨 소리를 하고 나가셨느냐?"

"예, 제가 어디서 오신 분이냐고 여쭈었더니 조선서 온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놈! 당장 가서 그 손님들을 모셔 오너라. 그 손님이 조선서 온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곧 우리를 두고 떼놈(중국사람)이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고는 아들에게 당장 손님들을 찾아오도록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아들은 달려 나가서 노인들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집으로 모셔들었습니다. 정대감이 보니 고향의 일가 어른들이었습니다. 버선발로 쫓아나와 노인들을 반갑게 맞아들여 사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보는 데 넙죽이 엎드려 큰 절을 올렸습니다. 아들도 덩달아 일가 어른들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향 어른들을 몰라 뵙고 무례한 짓을 하여 죄송하다'며 용서를 비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정대감도 자기가 아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라며 거듭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어른들이 시장하실 터이니 얼른 가서 저녁상을 차려 오너라!"

하고 저녁진지를 차려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얼마 안있어 잘 차린 저녁상이 들어왔습니다.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성찬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시장하였던 까닭에 저녁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상을 앞에 놓고 점잖을 피울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체면을 차릴 정신도 없었습니다. 밥알을 흘려가며 입가에 음식이 묻은 것도 모르고 허거지겁 먹었습니다. 이때 사랑방으로 할아버지를 찾아온 정대감의 손자녀석들이 노인들의 진지 드시는 모습을 보고서 흉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헤- 영감들이 밥도 추접게 처먹네!"

 

정대감이 이 말을 못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고약한 놈들! 포시랍게(호사스럽게) 키워 놓으니 밥 귀한 줄을 모르고 버르장머리 없이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냥 두었다가는 손자들을 다 버리겠으니, 오늘 한번 길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봐라!"

"예에!"

"이놈들을 꼭 사흘만 옥에 가두어 놓아라!"

하인들이 달려와서 손자들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손자놈들은 울며불며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으나 정대감은 못들은 체하며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사흘 동안 물외에는 일절 먹을 것을 주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이 닥쳤습니다. 정대감은 다시 하인들을 불렀습니다.

"여봐라!"

"예에!"

"오늘 시장에 가가주고서 좁쌀 석 되를 받아와서 밥을 지어놓아라."

 

대감님이 시키는 대로 하인들은 좁쌀 3되를 받아와서 조밥(좁쌀밥)을 지었습니다. 좁쌀은 낟알이 아주 작을 뿐 아니라, 찰기도 적기 때문에 밥을 해서 퍼놓으면 부실부실하여 숟가락으로 밥을 떠도 곧잘 흘러내립니다. 사흘 만에 손자 녀석들을 옥에서 끌어내다가 조밥을 한 그릇씩 퍼담아 주었습니다. 늘 배불리 먹던 녀석들이 사흘간을 쫄쫄 굶었으므로 배가 가짓껏(한껏) 고프던 터라, 평소에는 먹지 않던 조밥이지만 걸신들린듯 허겁지겁 퍼먹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히 조밥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이놈들! 추접그러(추잡하게) 밥은 왜 철철 흘리노?"

손자녀석들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치려고 애써 큰 소리로 호령를 합니다.

"밥을 흘리려면 당장 숟가락을 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다시 옥에 가두리라. 고얀놈들, 그저께 고향에서 할배들이 올라왔을 때 밥을 흘리며 먹는다고 추접다면서 수근수근 그랬지?"

그제서야 손자놈들이 밥숟가락을 놓고 꿇어엎드려 손을 머리 위로 싹싹 비비면서,

"할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어른들께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안하겠지?"

"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그래야지! 너희들 그러면 못쓴다.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라고 배가 고프면 밥이 단 법이니라.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체면 차릴 겨를이 어디있노. 너희들 한번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어봐라. 얼마나 깨끗하게 먹는지.... 고향에 그 할배들이 얼마나 허기가 졌으면 그렇겠노. 그리고 연세가 높아서 상노인이 되면 기운도 없고 또 흉될 것도 없어서 젊은 사람들처럼 체면같은 걸 본래 차리지 않는 법이다. 앞으로 노인들 뒷전에서 함부로 수근대지 말거라! 알아들었나?"

"예-,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동래 정씨 정대감께서는 아들과 손자의 버르장머리를 이렇게 확! 뜯어고쳤다고 합니다. 물론 그 뒤로는 시골사람들을 촌사람이라 괄시하는 법도 없고, 가난한 사람을 추접스럽다고 욕하는 법도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는 오렌지족이니 무슨 족이니 하면서 별 요상한 일이 다 벌어진다고 하는데, 막되 먹은 자식놈들을 제대로 길들일 만한 어른다운 어른이 집안에 없는 까닭이지요. 정대감 같은 할아버지가 새삼 우러러 보입니다.

 

출처: http://limjh.an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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