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은 보배중의 보배/봉덕스님
집착 말라는 것은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불자여러분들은 이 “무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의 근본교리 삼법인에 ‘제행무상 ’이라 하여 이 세상엔 영원한 것,
생멸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그 반대로
명예나 권력. 재물 그리고 젊음과 미모 목숨까지도 놓으려하지 않고
상견(常見)에 집착하여 패가망신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우리가 무상이라는 진리를 대하면서
“상견(常見)”보다 더욱 무서운 병통이 “단견(斷見)”입니다.
무상이라는 진리 앞에서 허무와 실의에 빠지거나 염세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짜피 죽으면 다 끝나는 인생 애써 노력하며 살아서 뭘 해!”(한탕주의)
“선행이니 악행이니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는 꿈속의 꿈
노릇이니 되는 대로 살자.”(막무가내파)
“해봐야 결국엔 모두 헛일 아닌가.”(허무주의)
이와 같이 우리는 무상 앞에서 상견과 단견을 내어 집착과 어리석음에
빠지는데 부처님은 무상이 자신을 정각(正覺)케한 보배중의 보배라 하였습니다.
무상계(無常戒)에 “무상이라는 것은 열반으로 가는 요긴한 문이요,
고해를 건너는 자비로운 배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들도 무상을 바탕으로
해탈을 이루었고, 모든 중생들도 무상에 의지해서 고해를 건널 수 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무상은 곧 생명이며 불성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눈에는 무상이 덧없고
허무해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피고지고 살아 있어
환희하고 춤추는 생명으로 꽉 찬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땅과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부처님의 일대 시교인 팔만사천 가르침이 모셔진 해인사 장경판전
법보전 법당 입구 양 기둥에 주련이 있는데 이 글귀는 자못 우리 중생들이
팔만대장경에 접근하는 문지기처럼 서서, 진리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에 접근하는 시각을 확 바꿔 놓는 글귀이며,
팔만장경을 한마디로 줄여 놓은 말이라 생각됩니다.
내용인즉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로
“깨달음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부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매 “현재 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꽃은 피고 지고,
생과 사로 변화무상한 이 곳이 바로 진리의 땅이요.
부처님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현의 말씀에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 나야한다고 했고
육근이 도적이고 보배니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지은 중생살이,
삼업으로 벗어나야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광 명 진 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 릍 타야훔
'불교이야기 > 禪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 신자들의 수행 (0) | 2011.05.16 |
---|---|
오계(五戒) - 광명사 도실스님 (0) | 2011.02.16 |
어느스님의 이야기 (0) | 2011.02.09 |
처음과 끝이 같은 게 선방수좌의 모습” (0) | 2011.01.14 |
回光返照(회광반조) (0) | 2010.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