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서울여대 김미자 교수의 복식고증을 거쳐 디지털 복원전문가 박진호씨와 함께 추정 복원한 혜초 인물도. |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고단한 여정을 마다 않고 떠나는 인도로의 성지순례. 지금은 교통편이나 현지에서의 숙식 등 순례 여건이 좋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나,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리던 옛 시절에 지극히 제한된 순례 길을 따라 부처의 체취를 찾아 나서는 일은 목숨을 건 구법의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천축으로 순례를 다녀온 후 『법현전(法顯傳)』을 남겨 당시의 인도 모습을 세세히 알린 5세기 초 중국 고승 법현(法顯)은 인도로 가는 교통로였던 실크로드를 “사막의 수많은 귀신들과 뜨거운 돌개바람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짐승 하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길은 바라다 보일 데까지 뻗어 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마른 해골 조각이 이정표일 뿐”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온 후에 “길은 거칠고 눈은 산마루에 수북히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이 들끓는다. 새는 날다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라고 그 험난한 길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천축으로 향하는 순례 길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고행길이었던 것이다.
천축으로 가는 길이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험난했음에도 부처가 본래 전하고자 했던 진리가 무엇인가에 의문을 품은 중국과 우리나라 스님들은 4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천축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 중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는 스님들만 해도 169명에 이를 정도로 그 수가 적지 않았다.
|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왕오천축국전. |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신라승 기록
특히 우리나라 스님들은 천축을 찾기에 앞서 중국으로 유학하는 게 순서였다. 학계에서는 6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대략 1000여명에 달하는 스님들이 중국으로 구법순례를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의연·지황, 백제 겸익·현광, 신라 각덕·원광 스님 등이 공식적으로 파견된 대표적 인물이며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입중구법(入中求法)’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스님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때 중국과 서역을 거쳐 인도까지 순례를 떠난 스님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한국불교에서는 인도 순례승이라고 하면 보통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 스님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천축에 갔던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당나라 의정(義淨) 스님이 24년간 인도여행을 하면서 쓴 인도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서역과 인도에서 구법한 61명의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의정 스님이 671년∼695년까지 30여 개 나라를 둘러보고 귀국 길에 올라 689년에서 691년까지 수마트라의 실리불서(시리비자야)에 체류하면서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혜업법사, 현태법사, 현각법사, 혜륜법사, 그리고 이름 모를 신라의 두 스님 등 신라승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중국 승철 선사의 제자로 사자국(스리랑카)에서 출가한 현유 스님에 대한 기록도 포함돼 있어, 혜초 이전에도 많은 수의 우리나라 스님들이 천축 땅을 밟았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신라 스님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인도를 순례한 스님은 혜륜선사(慧輪禪師)와 현각법사(玄恪法師)로 볼 수 있다. 범어 이름이 반야발마인 신라승 혜륜은 출가 후에 부처님의 성스러운 족적을 그리워하다가 당나라 초기에 장안으로 갔다. 장안 대흥선사에서 현증 스님에게 법을 배우고, 당 태종 이세민이 권좌에 있던 정관(貞觀) 연간(627∼647)에 칙서를 받고 천축으로 향하는 중국승 현조의 시자로 함께 인도에 갔다.
「현조본전」에서는 이들이 ‘사막을 건너고 설산을 넘어 멀리 오랑캐 땅을 지나 토번에 이르렀으며, 여기서 문성공주의 도움으로 북천축국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륜 스님은 이어 도란타국에서 4년 동안 범어 경전을 익혔고, 이어 남쪽으로 내려가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에서 4년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붓다의 유적을 순례 한 후에 나란다대학에 입학해 3년을 머물며 「중론(中論)」, 「백론(百論)」등을 익힌 것은 물론 「유가십칠지(喩伽十七地)」를 전수 받아 갠지스 북쪽의 신자사에 머물렀다. 이후 현조법사가 중국으로 귀국했음에도 홀로 남았다.
혜륜에 대해서는 이처럼 비교적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고 있으며, 의정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신라승 혜륜이 현조법사의 시자가 되어 함께 간 후 인도에 도착해 고루 불교유적을 참배하고 갠지스강 북쪽의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을 살았으며, 지금은 동쪽으로 가서 북방의 토카라 스님들이 사는 절에 머물고 있다. 이 절 이름은 건타라산다(建陀羅山茶)라고 했다. 혜륜은 여기서 머물렀으며 범어를 잘하고 또 구사학도 깊이 연구했다. 이때 나이 40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혜륜 스님을 설명했다. 그러나 혜륜이 이후 어떻게 살았고, 어디서 입적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혜륜 스님과 함께 현조법사 일행으로 천축으로 간 또 한사람의 신라 스님인 현각법사.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각법사는 인도에서 대각사를 예경하는 것으로 부처님 성지순례에 대한 소원을 풀고 그만 병에 걸려 입적하고 말았다. 의정은 이때 현각법사의 나이가 겨우 40을 넘긴 때였다고 전했다.
현태법사가 中 귀환 첫 순례승
혜륜·현각에 이어 혜업법사(慧業法師)와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도 비슷한 시기에 천축을 순례한 신라승이다. 아리야발마는 인도에서의 이름만 있을 뿐, 다른 법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의정의 기록에 따르면 당 태종 정관 연간에 장안을 떠나 인도에 도착해 성스러운 불교유적을 순례하고, 나란다사(나란다불교대학)에 머물면서 율과 논을 익히고 여러 불경을 간추려 베껴 쓰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나이 70에 나란다대학에서 입적했다. 그리고 혜업법사에 대한 기록은 의정이 부다가야 보리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하보디사원에서 당나라 불서를 조사하다가 ‘신라승 혜업이 베껴서 적었다’는 글을 보게 되면서 존재가 확인됐다. 혜업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범어 경전을 베껴 쓰다가 60세 가까운 나이에 입적했다.
혜초 이전에 천축을 순례했던 신라승들은 대부분 이렇게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입적했으나, 기록상 유일하게 중국으로 돌아온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현태법사(玄太法師)다. 인도 이름이 살바진야제바인 현태법사는 영휘(永徽) 연간인 650∼655년에 티베트를 경유해 네팔을 거쳐 중부 인도로 갔다. 부다가야의 금강좌에 있는 보리수를 예배하고 불교의 경과 논을 조사한 후 중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가, 지금의 청해성 지방인 토욕혼에 이르렀을 때 도희 법사를 만나 다시 인도로 가서 대각사를 참배한 후 당나라로 돌아갔다. 따라서 혜초 이전에 인도순례에 나섰던 신라 스님들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으로 돌아온 기록을 남겼다.
대부분의 신라 스님들이 인도로 가기 전에 머물렀던 중국 대흥선사는 현장, 의정, 혜초 등이 주석했던 곳이며 인도승들이 장안에 왔을 때 거주하는 거주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천축행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도에 대한 정보를 얻은 스님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가거나, 아니면 카투만두에서 북으로 가서 히말라야를 넘고 티베트 고원을 경유해 인도로 가는 직행로를 선택했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등장하는 신라 스님들은 대부분 티베트 고원을 경유하는 직행로를 거쳐 인도를 드나들었다. 이들 신라승들에 앞서 백제의 겸익이 인도에 다녀왔으나, 겸익의 인도행은 순례가 목적이 아니라 유학해서 불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들과는 인도를 다녀온 양상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구법승들 가운데 지금까지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순례 이후 여행기를 남긴 중국의 법현, 현장, 의정 스님과 신라의 혜초 스님이다. 이들 네 스님의 기록들은 부처님 이후 인도 불교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보물들이며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유실된 부처님 유적지를 복원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기록으로 꼽힌다.
|
정수일 교수 저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수록된 혜초의 서역기행도. |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인도 순례승으로 꼽히는 이는 역시 혜초(704∼787) 스님이다. 719년 당나라에 유학한 혜초는 광저우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고, 723년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 순례에 나섰다. 중국 광저우에서 상선을 타고 동천축(칼카타 근방)으로 들어간 혜초는 중천축(상카시아 근방), 남천축(나식크 근방), 서천축, 북천축을 순례한 후 파키스탄 북부, 아프가니스탄 북부, 파미르 고원, 천산산맥을 넘어 중국의 신강성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해로를 이용해 인도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온 혜초의 인도 순례행로는 칼카타에서 쿠시나가르, 녹야원, 파트나, 나란다, 왕사성, 부다가야, 바라나시, 상카시아, 사위성, 룸비니 순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4년간 인도 순례를 마치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일부에서는 장안으로 돌아온 733년까지를 순례 일정으로 역산해 혜초의 천축행을 10년으로 보기도 한다.
왕오천축국전 남긴 혜초 대표인물
혜초는 장안의 천복사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이라는 밀교 경전을 연구하고 한역에 착수했으나, 금강지가 죽은 후 중단했다가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배우고 773년 대흥선사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했다. 이후 780년 오대산으로 들어가 역경사업을 지속하던 중 787년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신라로 돌아오지 못해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혜초는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의 둔황 막고굴에서, 그가 인도순례를 마치고 썼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이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고대의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펠리오가 프랑스로 반출한 『왕오천축국전』의 첫 발견 당시 모습은 230줄에 6000여 글자가 새겨진 두루마리 모양이었으며,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천축으로의 순례길은 오늘날 혜초가 남긴 좬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해 법현, 현장, 의정 등 중국 스님들이 남긴 기록으로 인해 그 옛날의 모습을 알 수 있으나, 이미 260년과 282년 중국 삼국위(三國魏)의 주사행(朱士行. 203-282)이 첫 순례를 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 스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973호 [2008년 11월 10일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