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라김씨왕조의 민족사에서의 역활
신라의 융성기의 문을 연 17대 내물대왕(356~401)은 중앙집권적 강력한 왕권시대를 구축하면서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되었다.
내물대왕 26년 전진의 부견에게 위두를 사신으로 보냈다.
부견은 위두에게 묻기를 "경의 말에 해동의 사정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 변혁이나 명호가 바뀌는 것처럼 우리도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사신 위두가 지적했듯이 이미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국력도 크게 신장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영토확장이나 일반제도 문물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법흥대왕대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 국가경영의 사상적인 이념체계에 이르러기까지 완벽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540년 진흥대왕이 즉위하면서 한반도의 중요한 세력권의 하나인 가야제국을 합병하고 북쪽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일대와 함흥평야까지 이르는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력의 신장은 물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면서 발달된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 중에서 가장 척박한 영토와 적은 인구의 신라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번창할수 있었던 것은 외래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민족의 성향에 맞추어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뛰어났던 것이 가장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토착 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를 조화시켜 호국 불교로 승회시켰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지주인 화랑도 등을 만들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이념적인 바탕으로 쌓아 올렸다.
그로므로써 백성과 지도자가 하나 되는 신뢰감을 창출해 내었으니 신라 김씨왕조가 우리나라 역사상 위대한 것은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다.
그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척박한 땅에서 작은 인구로 대륙과 바다로부터의 수없는 외침을 물리치고 막강한 국력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마침내 29대 태종무열대왕과 문무대왕에 의해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나아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자주적인 통일을 완성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으니 우리 민족사를 통해 이때처럼 일사불란한 국가 경영체계를 보였던 때도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찬란한 민족의 고유문화를 창조하여 정착시킬 수 있었던 장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존재를 한때의 역사를 지배했던 단순한 국가의 흥망성쇠의 문제에 국한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길게는 한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문화의 창출이 없었다면 그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김씨왕조의 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사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존재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우리 김씨는 왕조 시대를 마감한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 두 왕조의 1천년 역사에서도 잠시도 그 저력이 소멸되거나 명백이 끊기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정은 왕조의 주역으로서나 아니면 조역으로서도 맡은 임무에서는 소홀함이 없었다.
우리 민족사의 중흥기에는 반드시 김씨가 있었고 난국을 맞았을 때는 언제나 앞장서 위난극복의 첨병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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