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절을찾아

남양주 水鐘寺

淸潭 2025. 6. 23. 10:50

"호남의 400여 사찰보다 낫다" 다산 정약용이 사랑한 절

박배민2025. 6. 21. 14:12
 

남양주 수종사... 두물머리 풍경도 좋지만 차 한 잔에서 배운 것

대한민국 곳곳에 숨겨진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발로 직접 걸으며 발견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전해드립니다. <기자말>

[박배민 기자]

§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 주소: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433번길 186
§ 국가유산: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
§ 탐방일: 2025년 6월 15일

수묵화 같⁠은 기억 속 그 절경
 
  수종사 전경
ⓒ 박배민
몇 년 전, 수종사(水鍾寺)에 처음 올랐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만난 두물머리 풍경이 마음을 꿰뚫고 들어왔다. 햇빛에 반사된 강물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했고, 강 건너 겹겹이 쌓인 산세는 박물관의 수묵화를 옮겨다 놓은 듯했다. 마음 한켠에 남아 있던 그 장면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가족과 함께 수종사로 향했다.
 
  산문을 수종사로 올라가다 보면 대불이 우리를 맞이한다. 대불 너머로 수종사 건물이 일부 보인다.
ⓒ 박배민
시야가 좁아질수록 풍경은 커진다
산사는 보통 세 개의 문을 지난다. 수종사도 그렇다. 첫 문인 일주문(一柱門)은 가장 컸다. 마치 세속과의 경계를 선언하듯 우뚝 솟았다. 곧 이어 나타나는 불이문(不二門)은 일주문의 절반만 했다. 불이문 뒤로 나타난 거대 석불이 경내에 다다랐음을 말없이 알려 주고 있었다.
 
  수종사로 진입하는 두 번재 관문, 불이문.
ⓒ 박배민
경내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해탈문이었다. 크기가 작아 거의 쪽문 같았지만, 문을 받치고 있는 수십 여개의 돌계단이 해탈문을 존재감을 키워주었다. 해탈문을 지나니, 마치 또 다른 세계처럼 사찰의 안뜰이 열렸다.
 
  해탈문.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다실 '삼정헌'이다.
ⓒ 박배민
하지만 마음속에 간직해온 그 절경은 아직 기다려야 했다. 해탈문 너머 삼정헌(三鼎軒)이 마치 무대의 막처럼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림막이 오히려 반가웠다. 삼정헌이라는 전주곡 덕분에 두물머리의 대선율이 더욱 장엄하게 울려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경내를 몇 걸음 걸었지만, 여전히 종무소와 운길산의 능선만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두물머리의 은빛 물결이, 강이, 산이, 구름이 한꺼번에 눈앞을 가득 메웠다.
 
  수종사 뜰에서 바라 본 두물머리.
ⓒ 박배민
수종사를 각별히 사랑했던 다산 정약용도 이와 같은 순간을 마주했을까. 수종사는 이렇게, 문을 지나며 시야를 점점 좁혀가다가 마침내 가장 광활한 세계를 선사하는 사찰이었다. 두물머리의 장관이 눈을 붙들었지만, 뜨거운 햇살은 내 발걸음을 그늘로 떠밀고 있었다.

축 위의 법문, 축 밖의 고요

수종사는 긴 축을 따라 가로로 펼쳐져 있었다. 그 중심선 위, 대웅보전이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야만,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 전각 안에서 스님의 법문이 새어나왔다.
 
  대웅보전 내부에 앉아 있는 스님의 모습
ⓒ 박배민
"인간의 몸은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질문처럼 스며든 그 음성이 내 마음 어딘가를 두드렸다. 나는 그 물음을 품은 채, 경내 가장자리로 몸을 돌렸다.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 강 쪽으로 길게 팔을 뻗은 고목 아래 벤치 하나. 그 위에 앉아 바람과 잎사귀의 속삭임, 법문의 잔향, 그리고 멀리 경의중앙선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도, 생각도, 잠시 숨을 죽였다가 살랑살랑 깨어났다. 고요와 흔들림이 겹치는 그 자리를 벗어나, 나는 다시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이제는 수종사가 품은 보물과 마주할 시간이었다.

조선 왕실의 기억, 돌에 머물다

수종사에는 두 점의 국가 지정 보물이 있다. 첫 번째는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다. 조선 전기,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를 비롯해 성종의 후궁들, 인목대비 등 왕실 여성들이 이 탑의 조성과 보수에 발원자로 참여했는데, 1950년대와 70년대 해체 수리 과정에서 출토된 묵서명을 통해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5층 석탑은 원래, 운길산 중턱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대웅보전 옆으로 옮겨졌다.
ⓒ 박배민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간결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부위별로 보면, 기단부(하단)는 불상받침대(대좌)처럼 생겼고, 탑신부(몸체)는 목조 건축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꼭대기는 기와지붕 형태를 띠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의 석탑 중, 이런 형식은 오직 수종사에만 있다. 발원의 정성과 미감의 결이 맞물린 탑. 수종사에 방문했다면,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존재다.
 
  원래 위치(동쪽 능선)에 있을 당시 5층 석탑의 모습
ⓒ 국립중앙박물관(공공누리 제1유형)
두 번째 보물은 '수종사 사리탑'이다. 팔각 받침대 위에 우뚝 선 이 탑은 높이 2.3미터로, 옆에 자리한 팔각오층석탑보다는 작지만, 안정된 구조와 균형으로 오히려 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리탑(왼쪽)과 5층 석탑(우측). 가운데 자그마한 3층 석탑은 아직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 박배민
앞에 서면 눈 높이에 있는 묵직한 지붕돌(옥개석)이 눈에 띄는데, 여기에는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사리탑을 문화 류씨와 금성대군이 시주하여, 정통 4년 기미년(1439년) 10월에 세웠다'라고 음각되어 있다.
 
  대웅보전 월대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사리탑. 단순하지만 묵직함을 느끼게 하는 조형미다.
ⓒ 박배민
정혜옹주는 박종우(옹주가 죽고, 후에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일등공신이 된는 인물)라는 인물과 혼인했으나 결혼 5년 만에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옹주의 죽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혜 옹주(貞惠翁主)가 돌아갔다. (중략) 임금(세종)이 고기반찬(肉膳)을 들지 않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 동안 정지시키고, 부의로 쌀·콩 1백 석과 종이 1백 권을 내리고, 관(官)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 세종실록26권, 세종 6년 10월 6일

당시 초혼 연령을 고려하면, 옹주는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왕실 여성이라도, 그것도 옹주를 위한 추모 탑이 별도로 세워지는 사례는 드물었기에, 이 승탑이 품은 사연은, 정혜옹주의 안타까운 생애를 넘어, 조선 초기 왕실과 불교의 관계, 여성의 위상, 불교 조형의 미감을 함께 전해준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예불 시간 동안 문을 닫았던 삼정헌이 다시 열릴 시간이었다. 애환이 서린 두 보물을 뒤로하고, 이제는 살아있는 역사가 숨 쉬는 삼정헌으로 향했다.

시(詩)와 선(禪)과 차(茶)의 공간, 삼정헌

수종사는 경내에 '삼정헌'이라는 다실을 운영하고 있다. 보통의 사찰에서 운영하는 카페와는 사뭇 다르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지만, 차값도 받지 않고, 차를 따로 내어 주지도 않는다. 자리마다 다기만 놓여 있을 뿐이다. 뜨거운 물을 부으며, 차를 우리고, 찻잎으로 설거지하는 일까지 참배객 스스로 해야 한다.
 
  차 우리기부터 정리까지 온전히 나의 몫이다
ⓒ 박배민
자리에 앉아, 차를 우리며 찬찬히 내부를 둘러본다. 벽면에 '자연방하(自然放下)'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으라'는 뜻이었다. 네 글자가 다실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연방하. 분별하지 않고 본래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 박배민
'다관'이라 불리는 손바닥만 한 도자기 주전자에서 찻잔으로 조심스레 차를 붓는다. 차향을 맡으며, 미리 공부해 온 삼정헌의 내력을 떠올려 본다. 조선 후기, 정약용과 초의선사, 정조의 부마(사위) 홍현주 등 당대의 차인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짓고 차를 나누었다. ⁠
 
  삼정헌과 뜰. ?비어 있음이 곧 채워짐이 되는 곳이었다.
ⓒ 박배민
정약용은 형들과 함께 수종사에서 과거를 준비했고, 유배 중에도 "호남의 400여 사찰보다 수종사가 낫다"고 말할 만큼 이곳을 그리워했다. 초의선사는 전라 해남에서 죽로차를 들고 올라와, 한양 문인들과 이곳에서 나누었던 순간을 이렇게 남긴다.
"수종사의 바람소리와 우레소리를 듣고 보니, 일체 세간의 온갖 악기 소리 따위는 소리도 아니었다. 수종사의 눈과 달빛을 보니, 세상의 온갖 빛깔들은 빛깔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수종시유첩'이라는 시집으로 남았다. 눈 덮인 겨울 산길을 따라 오른 그들, 찻잔을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는 지금도 삼정헌의 공기 속에 은은히 배어 있는 듯했다. 수종사는 그 시간들을 잊지 않고, 삼정헌으로 그 유산을 오래도록 우려내고 있었다. 차 한 잔이 남긴 여운을 품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삼정헌의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는 참배객들.
ⓒ 박배민
차 한 잔이 남긴 것
몇 년 전 처음 수종사에 올랐을 때는 그저 멋진 풍경에 감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공간이 주는 의미, 역사가 남긴 향기, 그리고 차 한 잔이 가르쳐준 마음의 자세까지. 수종사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머무르는 곳이었다.
 
  대웅보전 석등 넘어로 보이는 참배객
ⓒ 박배민
두물머리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이제는 보이는 것 너머의 깊은 울림을 함께 품고 내려왔다. 수종사의 차는 맛이 아니라 마음을 가르친다고. 그리고 그 가르침은 '자연방하', 자연스럽게 놓아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채널(브런치 등)에도 실립니다. 참고문헌 - 김세리, 조미라 『차의 시간을 걷다』, 열린세상, 2020 - 구산아, 일본 목조십일면천수관음보살삼존상 고찰 :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봉안 존상을 중심으로, 2020 - 왕주현,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서] 수종사에 올라 어찌 차 맛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다산의 체취가 가득한 마재(馬峴), 2012 - 국가유산포털 - 전통문화포털